가난
-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이웃사랑의 증거
Ⅰ. 도입
가난, 이 개념은 참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물질적인 가난과 정신적인 가난, 극복해야 할 가난과 추구해야 할 가난 들 가난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혹 교회가 가난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세상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래도 가난이 해결 안되어 그 체제가 변화되고 있다면 물질적인 가난은 과연 극복 안될 그 무엇인가?
국어사전식으로 가난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정말 먹을 것 없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논의를 사치스럽다고 할지도 모른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가난이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 또는 그 상태”를 뜻한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가난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 물질적인 가난에서 가치를 찾아낸다는 것이 그들에겐 우스광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난’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가난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가난에서 더 큰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성서적 가난이 순전히 정신적인 가난만을, 즉 재산에 대한 맞갖은 마음씨와 그에 대한 정신적인 홀가분함만을 요구한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을 물질적인 요소를 함께 뜻하는 것으로서, 그 어떤 형태로서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포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와 가난
1. 가난의 근거와 유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43항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 봉헌된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적 권유는 주님의 말씀과 모범에 바탕을 두었으며, 사도들과 교부들을 비롯하여 교회의 학자들과 목자들이 권장하는 것으로서, 일찍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아 주님의 은총으로 항상 보존해온 천상 선물인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을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복음적 권고의 하나로 보고 있는 헌장의 이 말은 가난이 성서적인 교훈과 가르침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름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과 가난의 실천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대목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당신에게 아직도 한 가지가 모자랍니다.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루까 18,22; 마태 19,21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 이하).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유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고린 8,9).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가난의 가치가 그리스도의 육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육화란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심, 곧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님이 되심을 뜻한다. 이는 그 분에 대한 호칭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인간이신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이고,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다.
2. 복음 삼덕으로서의 가난
- 공동체의 삶을 위한 나눔의 실천
가난이 복음적 권고의 하나란 말은 또한 가난이 정결과 순명과 함께 복음 삼덕이라는 적극적인 덕의 하나로서 추구된다는 것을 뜻한다. 복음적 권고인 청빈, 정결, 순명은 중세기 스콜라 신학 이후로 수도 생활의 특성을 이루는 요소로 인정되어 온 세 가지 수도서원의 내용이기도 하다. 수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 가지 덕을 자신의 모범과 말씀으로 권유하셨으므로 그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완전히 따르고자 했다. 가난을 통해서 수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더 자유롭게 따르면서(마르10,21 참조), 완전한 나눔(사도 2,44-45; 4,32-37)과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세 가지 복음적 덕목이 개인적인 삶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Vita Communis"로서, 즉 공동체의 삶을 위한 것으로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 삼덕이 어떻게 공동체의 삶과 관련되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난 : 재산의 공유를 뜻한다. 즉 재산을 혼자 가짐으로서의 부유함이 아니나, 재산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의 가난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가난을 실천한다’, ‘가난을 산다’라는 말은 ‘나눔을 실천한다’, ‘나누며 산다’, ‘나눔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버림으로써 가난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2) 정결 : 형제․자매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위한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3) 순명 : “개인적인 삶과 활동”의 “공동체의 삶과 과제” 에로의 결합으로 제시된다.
공동체의 삶의 원리를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한다면, 결국 공동체를 위한 가난은 사랑을 위한 가난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의 실천은 사랑의 실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가난의 의미와 가치는 사랑을 떠나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3. 정신적인 가난과 물질적인 가난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에 근거하는데, 그분의 말씀과 모범은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가난의 바탕이 있다!” “사랑에 가난의 의미가 있다!” “사랑하지 않은 가난은 의미가 없다!” “가난은 더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뉘어 진다. 우리는 이 사랑의 두 가지 측면에서 가난의 두 가지 측면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하느님 사랑이란 측면에서 정신적인 가난을, 이웃 사랑이란 측면에서 물질적인 가난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인 가난의 가치는 하느님 사랑에 있다”, “물질적인 가난의 가치는 이웃 사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처럼 가난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